언문세설 - 모국어는 내 감옥이다 (고종석 지음)
소설가이자 칼럼니스트, 에세이스트로 활발하게 활동하는 고종석의 산문집. '열림원 산문의 숲' 시리즈의 두번째 책으로, 한 주제를 놓고 치열하게 써 내려간 보기 드문 산문의 전경을 보여 준다. 이 책에서 고종석은 한글 자모 스물네 자를 따라 여행을 떠난다.
두어해 전에 이름을 지어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해외에서 자동차 디자인을 공부하고 있는 사람이었는데 푸조에 제출할 과제 때문이었다. 픽업트럭을 디자인했는데 그 이름을 우리말로 짓고 싶다고 했다. 그래서 '수레'라는 이름을 붙여줬다. 짐도 싣고 사람도 싣고, 뭔가 굴러가는 느낌도 있기 때문이었다. 그 이름이 진짜 쓰였는지, 과제가 채택이 되었는지는 모르겠으나 그는 그 이름을 참 마음에 들어 했다.
수레. 우리가 일상에서 자주 쓰는 말이다. 그래서 우리나라에서는 브랜드로서의 가치가 별로 없다. 하지만 다른 나라에서는 다르다. 승용차 이름이기도 한 '체어맨'과 그것의 우리말인 '회장님'의 차이를 생각해보면 알 수 있다. 두 낱말의 뜻은 같지만 뉘앙스가 다르고 친근감이 다르다. 체어맨이 낯설어서 이색적이라면 회장님은 낯익어서 진부하다. 그런데 낯익기만 한 것 같은 우리말도 한 꺼풀 벗겨보면 새롭고 신선하다.
한창 영어 공부를 하다 머리를 식히려고 펴든 책이어서 더 그랬는지 모른다. 일단 책장을 넘기면 두 줄짜리 머리말과 ㄱ부터 ㅎ, 그리고 ㅏ부터 ㅣ까지 한글의 닿소리 홀소리만 나열되어 있는 차례가 더더욱 그런 느낌을 부채질한다. 각 장에 보기로 나온 수많은 낱말들을 소리 내어 읽는 재미가 쏠쏠하다.
이 책에서 '언문'을 설명하기 위해 나오는 자음접변이나 선행모음, 격조사, 구개음화 따위의 문법용어들이 익숙하지 않은 것은 당연하다. 우리글을 따로 공부해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학교에서 배우긴 배웠겠지만 몰라도 충분히 잘 쓴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기억에 남아있지는 않을 것이다. 영어 문법이라면 아마도 잘 알고 있겠지만.
그래서 우리글에 대한 나의 나태함, 자만심, 무관심 이 모두가 이 책 앞에서는 무너져버린다. 내가 알고 있던 게 별거 아니었고, 내가 하찮게 여겼던 것이 전혀 하찮지 않았고, 내가 외면했던 것들을 더 이상 외면할 수 없었다. 나 또한 글쓴이와 마찬가지로 모국어의 감옥에 갇혀버리고 만 것이다. 그렇게 기역, 니은, 디귿, ... 나아가다가 리을에서 멈추고 말았다. 리을, 리을, 리을, ... 한글의 닿소리 가운데 ㄹ만이 ㄹ로 시작하는 독립된 토박이말이 없다. 그래서 우리가 아는 ㄹ로 시작하는 말은 모두 외래어다. 그게 참 신기하기도 하고, 기역에서 디귿으로 오는 동안 좀 지루했기 때문에 리을에서 멈춰버렸다.
글쓴이가 그러길 ㄹ의 본성은 흐름이다. 흐르고 흐르는 게 ㄹ이다. 비록 ㄹ로 시작하는 말은 없을지라도 ㄹ을 포함하는 많은 말들이 그 본성을 지니고 있다. 나는 걸어 다니는 사람이고, 눈물을 흘리며 눈시울을 적시고, 쌀밥과 나물을 먹고, 거울을 보며 얼굴을 가꾸고, 신발을 신고 자갈을 밟는다. 그러니 나도 ㄹ을 타고 흐른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픽업트럭 수레에도 ㄹ이 있다. 사람들이 그 수레를 타면 ㄹ이라는 바퀴를 타고 정처 없이 흘러가게 될까.